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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의 역사/문화

연천의 특별한 이야기

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펼쳐진 비옥한 토지는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 주어 일찍부터 연천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연천은 자연․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정 중앙에 위치하며 해로와 육로상의 교통의 요지로서 선사시대에는 한국 고인류의 발상지이자 교두보 역할을 하였습니다.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으로서 또한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주변지역으로서 역사와 문화가 소통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연천은 또한, 수계(水系)상으로 임진강이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관통하면서 한강유로에 잇닿아 서해로 흘러드는가 하면 육로로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놓여진 경원선의 중간지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던 시절에는 서울과 원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이 곳 중간기지인 연천역에서 급수를 공급받았습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본 모습(한반도 지형)


연천의 선사문화

전곡리 구석기유적을 비롯하여 현재 연천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은 그 수만도 상당하여 발견되지 않은 지역과 멸실된 유적을 감안하면 수 백 곳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전기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석기의 일종)가 발견되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지만 유적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유물의 종류와 출토양도 상당하여 앞으로 고인류의 발생과 그 전개 과정을 밝혀줄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됩니다. 1979년 제1차 발굴 조사 현장 설명회 모습

1978년 그렉보웬이 발견한 주먹도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원시적인 농경을 바탕으로 청착생활이 시작됩니다. 연천의 전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선사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연천의 유구한 역사와 이곳의 자연과 더불어 다양한 문화를 일궈냈던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혜를 엿 볼 수 있습니다. 군남면 삼거리, 백학면 학곡리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을 비롯한 연천 내 20여 곳에서 발견된 30여기를 넘는 청동기시대의 다양한 고인돌 유적들은 이를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고인돌 유적은 흔히 북방식으로 불리는 탁자식고인돌과 남방식으로 불리는 개석식이 고루 산재해 있는데 이와 같은 다양한 축조 양식뿐 만 아니라 입지 및 분포상태, 현무암 등 소재의 선택 등으로부터 연천 지역만의 특징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장기간에 걸쳐 내․외부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문화로 발전시킨 당시 사람들의 삶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연천 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달되고 재 생성되어 연천만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양원리 고인돌


연천의 역사문화

초기 국가를 형성하던 시기 연천 지역은 백제의 영역으로서 백제가 한강유역에 기틀을 마련하기 전 단계의 움직임이 바로 여기서 포착됩니다. 백제의 건국세력인 고구려의 유이민 집단은 이 곳 연천의 한탄강과 임진강 주변에서 권력을 다지며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실마리는 바로 두 강변에 조성된 적석총들 즉, 백학면 학곡리 적석총(돌무지무덤), 중면 삼곶리 적석총을 비롯하여 미산면 우정리 ․ 동이리 적석총 등에 숨겨져 있습니다.

학곡리 적석층

삼국이 각축을 벌이며 영토전쟁을 하던 시기,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연천지역은 초기 백제의 영역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연천에서는 고구려의 관방유적인 보루와 성이 10개소 정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강을 따라 형성된 높이 10여 미터 이상의 자연절벽(현무암 주상절리)등 연천의 특수한 자연조건을 충분히 이용하고 고구려 특유의 앞선 성 축조기술로 이루어진 유적들로 건축적․학술적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큽니다.

연천의 자연지리적인 장점을 살려 교통의 요지 마다 축조된 고구려의 평지성들은 호로고루, 은대리성, 당포성 등으로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사수하던 요새로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이 성들은 교통의 요지에 있었기에 계속 보수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곡읍 신답리에서 발견된 석실 봉토분은 고구려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삼각조임식이라는 고구려 특유의 석실 천정구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호로고루 성 내부 모습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던 고구려도 결국 백제에 이어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한반도 처음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통일신라의 탄생은 연천에서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한반도를 전부 장악하려던 당의 야심에 맞서 신라와 백제․고구려 유민이 합심하여 치룬 매소성 전투의 승리가 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매소성, 현재의 대전리 산성으로 비정되는 곳으로 이곳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그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 비록 영토는 줄었지만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하였습니다.

통일된 신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이를 다시 통일하게 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귀부(歸附)하였고 개경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의 묘는 신라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현재의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위치합니다.

경순왕릉

한편, 왕건은 고려를 세우기 이전부터 한반도 남쪽 평정을 위해 이 곳 임진강유역을 숱하게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치가 탁월한 임진강변 현재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그의 원찰인 앙암사에 머물며 그의 대업을 구상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앙암사 근처에는 그가 마셨다는 약수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어수정(御水井)이라 불리고 있으며, 그의 사후 그의 위패와 영정이 이 곳 앙암사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시초로 조선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비롯한 고려의 왕들과 고려 16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숭의전(崇義殿)을 이곳 앙암사 터에 세웠습니다. 비록 한국전쟁으로 당시의 건물들은 전소되었지만 현재 재건된 건물에서 매년 두 차례씩 제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숭의전 추계 대제 모습

근세 이후로 연천 지역은 수륙을 통해 해안과 내륙을 연계하는 물류의 공급 및 교류처로서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어왔습니다. 임진강 및 한탄강을 따라 크고 작은 나루터가 형성되었고 육로를 따라서는 역참과 파발로가 이 지역을 경유하였습니다. 특히 장남면의 고랑포구는 한국전쟁 전까지 가장 큰 상권을 가지고 있었던 곳으로 경기 북부 최대의 물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포구의 번화함은 잃었지만 임진강을 품은 그 아름다움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편 연천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조선시대의 수도인 서울로부터 지리적으로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수적으로도 온화한 지세를 지니고 있어 일찍이 많은 문벌들이 터를 잡아왔습니다.

1930년대 고랑포구 모습

따라서 유명한 학자와 더불어 장군 등을 다수 배출하였고, 곳곳에 명현들의 묘소가 자리하여 현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는 운성부원군 박종우, 영원부원군 윤호, 미수 허목 선생과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정발 및 박진 장군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의병장들이 이곳 연천의 임진강유역과 높고 험준한 보개산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보개산 일대에 있었던 지장신앙의 성지로 유명한 심원사는 당시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천년을 이어온 가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항일의 맥은 3․1운동으로 이어져 연천의 20~30대 젊은 농민이 주축이 되어 일본군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고 전해집니다.

미수 허목


연천의 현실과 비젼

연천에 대한 옛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연천(漣川)이라는 명칭은 1413년(태종13)에 고려시대의 연주라는 이름에서 개칭된 것으로, 이 후 몇 차례의 개편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연천현에서 연천군으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4년 마전군․적성군 전역과 삭녕군의 일부 및 양주군의 영근면(현 전곡읍)이 연천군에 편입됨으로써 현재의 연천군의 영역으로 자리 잡는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후 8․15광복 이후에는 3․8선 북쪽에 위치한 대부분의 연천지역이 북한의 통치를 받았고, 한국전쟁으로 치열한 전쟁 끝에 오늘날의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되었습니다. 행정구역은 1954년 이 후 차례로 수복되었으나 아직도 군의 북쪽 상당부분이 북한에 포함되어 문화의 단절은 물론이고 남북대치의 상황 속에서 개발과 발전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많은 군사보호시설로 인한 개발 제한과 수도권 지역으로서의 개발 제한 등 이와 같은 복합적인 중첩규제는 연천의 발전과 경쟁력에 큰 걸림돌이 되어 심지어 인구의 감소까지 야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는 지방자치가 틀을 다져가면서 그 지역만의 특색과 문화가 곧 경쟁력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앞서 문화재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 본 연천의 역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어느 지역과도 견줄 수 없는 높은 경쟁력을 지닌 그야말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유서 깊은 역사와 독창적인 문화가 감겨져 있는 연천이라는 실타래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 나가야 할 때이다. 1978년 연천 전곡리에서 우연히 발견된 석기 몇 점에서 비롯한 연천 전곡리의 기적이 이제 통일한국 심장, 미라클 연천으로 이어져 앞으로 통일 선진국을 향한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로 연천을 중심으로 다시 쓰이길 기대해 봅니다.

연천 전곡리 구석기 축제(조형물)